조선시대 교육
조선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와 정권 교체를 했다. 조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제 영역에 걸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고, 부분적인 개혁과 재정비를 추진하였다. 조선의 정치 체제는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취하고, 지방의 모든 행정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료에 의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양반 관료 체제를 구축하고, 문신이 주축이 되어 모든 정치 체제를 이끌어 갔다. 그리고 행정 실무는 잡과를 통하여 선발한 관료를 두어 종사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사회 체제는 신분 제도가 있었다. 조선의 신분 제도는 양반(兩班), 중인(中人), 양인(良人), 천민(賤民)으로 대별된다. 군왕(君王)을 중심으로 하여 양반 계층은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여기에서 군왕은 세습적이었으며, 양반 계층은 세습적이었으나 개인의 능력을 보아서 선발하였다. 신분은 세습적이면서도 개인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면 몰락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양반 계층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학문적인 소양이 없고 오랫동안 관료로 등용되지 못하면, 신분적으로 하락하게 되어 있었다. 피지배계층에는 양인과 천민이 있다. 양인은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자유민의 성격을 갖는다. 이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국가에 공헌함으로써 지배 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게 되어있었으나, 실제로 그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천민 계층은 생산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신분은 관청이나 개인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세습적이었다. 천민은 신분의 변화가 매우 어려웠다. 조선의 신분 제도는 세습적인 요소와 함께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조선의 사상 체제는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한 유학(儒學) 사상으로 단일화되어 있었다. 조선은 숭유정책을 실시하면서, 불교, 노자, 장자 등의 사상은 배척하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하여서는 국가적으로 탄압하고 배척하였다. 조선은 유학의 사상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정치, 경제, 교육 등 제 분야에 유학적 생활양식이 융화되도록 하였고, 가치 기준도 이에 근거하도록 하였다. 조선사회에서 유교의 사상은 가치 기준, 생활양식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정신적 요인이 되었다. 유학은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심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사상으로서, 조선 초기에 국가 건설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으며, 사회 개혁에도 상당히 기여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이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활발하여,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조선 중기는 유학의 연구가 집대성된 시기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유학을 사변적인 공리공담(公理空談)의 학문으로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16세기 양대 병란이 있은 후, 사변적인 유학 사상은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작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기에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사상으로 실학(實學)사상이 대두되었다. 실학사상가들은 사변적인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제적인 학문으로서의 유학을 강조하였다. 실학자들은 유학 사상의 근본에 의거하여 실증적 연구와 사회제도의 개혁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실현에는 한계를 가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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